에스더 5 (하나님의 섭리)
- 본문: 에스더 5장
- 일자: 2017/11/22 (수)
- 오디오 파일:에스더5.m4a
서론
세상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해지고 있습니다. 청교도와 하나님의 축복의 땅이 었던 미국도,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치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나 교회를 이용 사리사욕을 채우며, 교회에 총기 난사하고, 미디어는 물론 학교, 심지어는 교회도 무지개 깃발을 달며 하나님께서 죄라 한 것을 죄라 가르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는 힌두의 디왈리라는 우상숭배 활동은 장려하지만, Merry Christmas가 아닌 Happy Holiday하며 주님의 이름을 빼고 여러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고 있습니다. 세상뿐 아니라 교회 내부적으로 기복신앙, seeker friendly 하며 교인들의 가려운 귀를 긁는 거짓 가르침 때문에 진정으로 중생한 성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이거나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치, (벧전) 5:8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오늘 본문의 하만이 유대인들을 해하려는 것처럼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빼앗으려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믿음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때로는 염려와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염려와 걱정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잊을 때 찾아옴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에스더 책에는 하나님이 한 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섭리를 가장 잘 그린 책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Divine Providence)란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혜와 사랑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보살피며 통치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라 정의합니다. 에스더 말씀을 준비하며 "모든 것을 통치하는 다스림" 하나님의 섭리를 조금 이해하며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함께 나누며 마지막 때에 믿음 굳건히 지키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먼저, 오늘까지 이야기를 요약하면, 유다가 바빌론에 망명 후 약 100년 뒤 (483 BC - 473 BC), 유다 백성이 페르시아에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당시 왕은 아하수에로 였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에게 불순종한 여왕을 패위를 시켰고 에스더를 새로운 여왕으로 선택합니다. 하만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왕 다음으로 높은 위치에 오르고, 모든 사람이 그에게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에스더의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 않자 하만은 매우 분개했고, 모르드개 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죽일 계획을 하고 왕의 허락을 얻어냅니다. 이 무서운 사실을 안 모르디개는 에스더에게 왕에게 나가 유대인 구원을 청하라 부탁합니다. 당시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에게 접근하면 죽임을 당하는데 (4:11), 에스더는 그 유명한 “죽으면 죽으리이다(4:16)” 다짐하고 유다 백성들과 3일간의 금식 후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본론
에스더의 담대함 (1-8)
에스더가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접근했는데, (2) 왕에게 에스더가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금 규 (the golden scepter, 왕훌, 왕의 장식 막대기)를 에스더에게 내밀고 에스더가 그것을 만집니다. 아마도 당시 왕에게 접근하는 프로토콜이었던 것 같습니다. 왕은 먼저 부르지 않았는데 불쑥 나타난 에스더가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하며 허락하는데, 물론 에스더가 이뻐서도 이지만 기분이나 환경이 맞았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아무리 이뻤어도 그날 왕이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던가 다른 후궁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또한, (4:11) 왕은 에스더를 30일 동안 보지도 않았습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에스더서의 주제인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3) 왕이 에스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노라” 약속합니다. (6절에도…, 7:2) 눈이 뒤집힌 것이죠. 우리도 연애할 때 애인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느껴지고 또 그런 약속을 합니다. 후에 물론 바뀔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어떤 호르몬 작용인지 특히 남자들은 그런 약속을 합니다. 어떻든 왕이 스스로 한 말이기에 책임감 양심이 그 약속을 지켜 에스더의 청은 무엇이든 들어주려는 마음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도 하나님의 섭리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4-5) 에스더는 왕에게 잔치를 베풀 터니 하만과 함께 오라하고, (6-8) 잔치 자리에서 에스더는 다음날 잔치에 또 초청하고, 그 날 자신의 청을 왕에게 말하겠다 합니다. 에스더가 왜 처음에 말하지 않고 두 번째 찬치를 준비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에스더서 저자는 첫 번째 잔치와 (7장) 두 번째 잔치 사이에, 하만의 자랑과 모르드개를 죽이려는 음모를 소개하며 그것과 비교되게 (6장) 왕이 갑자기 모르드개가 자신을 구한 사건을 기억하고, 모르드개가 하만을 통해 높아지는 극적인 반전으로 하만의 계략 위에 있으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영화처럼 전개해 나갑니다.
하만의 자랑과 음모 (9-14)
하만이 잔치 후 기분이 좋아 집에 가는데 자신을 무시하는 모르드개를 보며 화가 납니다. 화를 참고, 집에 가 친구와 아내를 부르고, (11, 12) 자신의 성공, 자녀가 많은 것, 왕이 자신을 높인 것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13) 하만은, 모르드개 때문에 만족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만은 "유다 사람" 모르디개라고 합니다. 하만이 모르드개 뿐 아니라 유다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4) 하만의 아내와 친구들은 높은 나무를 세우고 모르디개를 잔인하게 죽이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실제적인 죄를 만들어 내며 살인까지 계획하게 합니다. 그런데, (7:10) 하만은 스스로 세운 높은 나무에 죽고, (9:1) 유대인을 미워하는 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데 하만의 아내와 친구들도 함께 죽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섭리가 계속 이어집니다.
에스더서 주제,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 그 섭리를 이해하고 믿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 하기에 섭리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Providence)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혜와 사랑으로 우주의 모든 것을 보살피며 통치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왕에게 불쑥 찾아온 에스더가 사랑스러워 보이는 장면뿐 아니라, 전에 에스더가 여왕으로 뽑히는 과정, 모르디개가 우연히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듣고 왕을 구하여 신임을 얻는 사건 (2:23), 내일 본문을 비롯해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 과정 과정이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받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에스더서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으며, "우연"과 "반전"의 배경에 계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부재가 느껴질 때라도,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려는 목적으로 에스더서뿐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계속 가르치고 있습니다. 관련된 구절들을 정리해 놓은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들어보시죠. (시 103: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우주 전체의 통치자로서, (마 5:45)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실제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이로써 , (시 66:7)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나라와 사건들의 주관자로서 , (갈 1:15)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인간의 운명을 정하시는 이로써 , (눅 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인간의 흥망성쇠를 관여하시는 이로 , 그리고 (시 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성경은 우주로부터 우리 인간 각자의 모든 것을 보살피며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자녀를 보호하시는 섭리를 우리는 느끼고 실제로 체험하며 놀라고, 기뻐하며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신뢰가 더하여 가는 것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찾아보며 결론으로 맺겠습니다.
적용/결론
오늘 본문에서 에스더가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나아가는 담대함은 어디서 왔을까요? 저는 답을 4장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왕에게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에스더에게 모르디개가 충고합니다.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고, 약속을 지키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에스더를 통하지 않더라도 이루어질 것도 믿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도 그분의 뜻을 이루실 수 있기에, 우리가 그 뜻에 참여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의 뜻은 꼭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이루어지기에, 제가 아니더라도, 목사님이 아니더라도, 코너스톤이 아니더라도, 심지어는 우리가 믿든 안 믿든 복음은 땅끝까지 전해지고 예수님은 통치와 심판 주로 곧 재림하십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4:14)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합니다. 협박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운명적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통치에 섭리에 우리 인간은 순종으로 반응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동참하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순종치 않았을 때 consequence 결과는 두려운 것입니다. 에스더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에스더는 유다의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에스더와 그 집안은 망했을 것입니다.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you and your father's house will perish)"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 (if I perish, I perish)" 세상 왕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멸망 당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왕에게 죽을 것인지 선택에 에스더는 왕에게 죽을 각오를 했고 오늘 본문에서 왕에게 나아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며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에스더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죽으면 죽으리라" 세상에서 죽는 것을 택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위해 세상에서 죽는 선택 해야 하는 것이죠.
오늘날 팽배한 기복 신앙, 세상과 대충 발을 걸치며, 뜨뜻미지근한 믿음이나 불순종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가르치는 거짓 가르침이 많은데, 예수님의 이 말씀과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에 하신 회개하고 열심 내지 않으면 토하여 버리신다는 경고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간지러운 귀를 긁어 주는 거짓 가르침 따라가면 우리는 멸망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섭리 믿고 순종하면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세상이 죽이면 죽으면 되니까요. 그 믿음에 성령님께서 저희를 억지로가 아닌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십니다. 공급해 주실 것을 알기에, 욕심낼 필요없고, 구원해 주실 것을 믿기에 변명할 필요없고, 보호해 주실 것을 신뢰하기에 담대하게 의를 행하며 복음을 선포하게 도우십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세상에서는 죽고",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자유와 생명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죠. 그러며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더 경험하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분의 통치의 영광을 보니 더 기뻐하며 더 순종하게 되는, 좋으신 주님의 선한 사이클을 타게 되는 것입니다.
맺겠습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왕에게 나아가듯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꼭 이루어지는 그 섭리를 믿기에 세상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에스더가 이스라엘 구원의 귀한 도구로 쓰였듯, 마지막 때에 담대하게 순종하며 구원의 도구로 복음의 도구로 귀히 쓰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관련 문서
검색: 에스더서